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시칠리아 왕국 (문단 편집) == 역사 ==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래 갈라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15세기 말부터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보르본 왕조|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지배 아래 [[동군연합]] 상태였다. 두 왕국의 재통합은 [[1806년]] [[앙드레 마세나]] 휘하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부르봉 왕조의 페르디난도 4세(나폴리)/3세(시칠리아)가 쫓겨나고 [[호세 1세|조제프 보나파르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추대되면서 시작되었다. 조제프와 그 후임인 [[조아킴 뮈라]]는 명목상으로는 [[시칠리아]]까지 포함한 옛 시칠리아 왕국령 전체의 왕이었지만,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 해군]]으로 인해 실제 지배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로 한정되었고 시칠리아에는 부르봉 왕조가 도피해 있었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면서 페르디난도 왕이 복위되었고, 페르디난도 왕은 1816년 동군연합을 청산하고 두 왕국을 실질적, 형식적으로 통합시켜 양시칠리아 왕국을 선포해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했다. [[이탈리아 통일]] 이전 [[이탈리아반도]]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이탈리아를 통일한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정도는 찍어누르는 인구와 면적을 가졌으나 농업 위주 경제와 높은 교회 소유 토지 비율[* [[조제프 보나파르트]] 시기 혁명 프랑스를 본받아 교회 토지와 공유지를 경매에 부치는 개혁을 단행했으나 자영농 비율이 유의미하게 올라간 프랑스와는 달리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개혁 대상 토지들이 모두 귀족 및 부르주아 층에게 돌아가 대지주제가 공고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가난한 소작농들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경작 조건이 널널하고 착취가 덜한 공유지와 교회 토지를 빼앗기는 꼴이 되었다.], 높은 문맹율 등으로 내실이 빈약했기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반대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보다 인구는 부족했을지 언정 [[토리노]], [[노바라]], [[제노바]] 등의 도시들과 [[포 강]] 유역의 풍부한 수력 자원을 중심으로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켰고 [[토리노 대학교]], [[제노바 대학교]] 등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경제력과 교육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지녔다.][* 남이탈리아를 통째로 차지한 양시칠리아한테만 열세였지, 사실 사르데냐-피에몬테는 양시칠리아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일대의 소국들 중 면적이나 인구 측면에서 세력이 가장 큰 나라였다.] 특히 3대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자유주의 탄압이 결정타였는데, 페르디난도 2세는 1830년 즉위 초기만 해도 민생 개선 노력과 적극적인 산업화 노력,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 제1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참전으로 인해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1837년의 헌정 실시 요구 집회에 대한 무력 진압을 기점으로 보수화되어 자유주의 세력의 헌정 실시 요구를 거부하고 이를 탄압으로 일관하여 대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러다 전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을 계기로 페르디난도 2세는 결국 헌정을 승인하였으나 얼마 안 가 의회와의 갈등을 계기로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여 전제군주정으로 회귀하였고, 이후의 치세 동안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결과적으로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대내외적 인식도 나빠져, 통일론자들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 등 외국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페르디난도 2세는 1856년의 암살 시도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859년 사망하였고, 양시칠리아 왕국은 [[프란체스코 2세]]가 막 즉위한 혼란기 속에서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1860년]] [[4월]] 시칠리아에서는 [[보르본 왕조|부르봉 왕가]]에 대한 [[주세페 마치니]] 파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5월]]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천여명(이른바 천인대라고 한다.)이 시칠리아 섬에 진격, 시칠리아의 중심지 [[팔레르모]]를 점령 후 [[9월]]에는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가리발디의 나폴리 점령에 호응해 나폴리로 남하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르데냐-피에몬테군은 [[테아노]]에서 가리발디가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모두 국왕에게 바치면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직후 10월에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사르데냐-피에몬테와의 통합 결정이 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국왕 [[프란체스코 2세]]와 왕비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는 가리발디가 나폴리로 진격해오자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인 [[가에타]] 요새로 도망쳐 농성했으나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1861년 2월 가에타를 포기한채 [[교황령]]으로 망명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